찍찍이로 만든 파도, 금속 실로 색칠한 단색화

입력 2023-12-17 18:18   수정 2023-12-18 00:20


좋은 예술품은 소장 욕구를 자극한다. 사람들에게 휩쓸려 ‘보는 둥 마는 둥’ 급하게 볼 필요 없이 사적인 공간에서 내가 원할 때마다 작품을 시간 들여 감상할 수 있으니까. 컬렉터들이 전시장에서 좋은 작품을 마주치면 사들이는 이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컬렉터가 될 순 없는 일. 돈도 돈이지만 작품들을 들여놓을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워서다.

서울 논현동 플랫폼엘에서 열리고 있는 ‘저스트 아트: 비욘드 보더스’는 이런 점에서 특별한 전시다. 이곳에선 25명의 작가가 각각 큰 설치예술품과 브로치, 귀걸이 등 작은 공예품을 함께 전시한다. 흔한 장신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나하나 예술작품으로 분류해도 될 정도로 섬세하고 신선한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데다 큰 공간도 필요 없다. 몸에 걸칠 수 있는 작품도 있으니…. 초보 컬렉터에게 안성맞춤 전시회인 셈이다.
○‘찍찍이’로 만든 파도와 꽃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김용주 작가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김 작가는 ‘찍찍이’로 불리는 벨크로 테이프로 작품을 만든다. 한 겹 한 겹 쌓아올린 검붉은 벨크로 테이프는 거대한 파도가 돼 관람객을 맞이한다. 그 옆에는 작은 꽃 모양 브로치들이 있다. 김 작가가 벨크로 테이프를 하나하나 붙여서 만든 작품이다. 같은 재료, 같은 기법으로 거대한 설치작품과 자그마한 장신구를 만들었다.

그 옆에는 성인 키보다 큰 거인이 서 있다. 섬유공예가 윤순란이 천을 감싸서 만든 사람 모양의 설치작품이다. 가늘고 긴 사람 조각으로 인간의 고독을 다룬 ‘조각 거장’ 알베르토 자코메티처럼 윤 작가도 이를 통해 ‘인간의 몸이란 무엇인가’란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설치작품을 통해 인간의 몸을 나타냈다면 작은 브로치에선 몸의 일부분인 입만 다뤘다. 드레스를 만들 때 쓰는 오간자 섬유로 혀, 이빨 등 독특한 모양의 브로치를 선보였다.

공예 부문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로에베재단이 선택한 예술가 7명의 작품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이 전시의 매력이다. 로에베재단은 매년 세계 최고 공예가 한 명을 뽑아 ‘로에베재단 공예상’을 수여하는데,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된다.

올해 최종 후보에 오른 금속공예가 신혜림은 이번 전시에서 얇은 금속 선을 일일이 칠해 실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걸 한 올 한 올 배치해 단색화를 만들었다. 2020년 최종 후보자인 김계옥 작가는 구리선을 실처럼 뜨개질해서 3차원 오브제와 브로치를 제작했다. 얼기설기 얽힌 얇은 선을 통해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피부를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공예는 기술일 뿐? 그저 예술!”

이 전시가 의미 있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공예를 순수미술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열렸다는 점이다. 지금껏 공예는 ‘순수미술보다 한 수 아래’ 취급을 받아왔다. 순수미술은 ‘오로지 예술을 위한 예술’이지만 공예는 ‘실생활 물건을 예쁘게 꾸미는 기술’이란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전시를 기획한 구혜원 푸른문화재단 이사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공예가 단순히 예쁜 장신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순수미술처럼 깊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전시 제목이 ‘저스트 아트’인 이유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그저, 예술’. 공예를 단순한 장식 기술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한 예술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저스트(just)’에는 ‘공정한’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구 이사장은 “공예와 순수미술을 수직적인 위계 관계로 보기보다는 각 예술가의 작업이 오로지 예술적 가치에 따라 평가받는 공정한 예술이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전시는 12월 21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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